수험생들이 마음을 다잡고 싶을 때 찾아보는 영상의 주인공
남이 버린 문제집으로 공부해 '1타 강사', 이지영 강사
이채연 기자
"지금 네가 생각하는 도망쳐도 되는 이유, 그게 널 계속 도망치게 할 거야. 도망쳐서 도착한 곳에 천국은 없어."
이지영 강사
100억 대 연봉. 수강생 350만 명. 자가용 요트. 요리사가 나만을 위해 만든 음식. 정원사가 관리하는 마당 있는 집. 스포츠카 10대.
지금 내가 누리는 것이다.
새벽 4시 30분. 나의 하루가 시작된다.
1982년 12월. 인천의 한 반지하 월세방에서 태어났다. 고졸인 아버지는 평생 트럭 운전을 하셨다. 어머니는 초학교도 제대로 마치지 못했다. 우리는 기초생활수급자였다. 그리고 나는 전교에서 다섯 명이 채 안 되는 무료 급식 대상자이기도 했다. 교복을 사는 건 꿈꿀 수 없었다. 남이 버린 문제집으로 공부했다. 그 문제집조차 풀고 나면 아궁이 땔감으로 썼다.
어느 날 집이 물에 잠겼다.
손글씨로 빼곡히 적은 요약 노트. 여백에 필기한 것이 가득 적힌 교과서. 주워왔지만 정성 들여 필기한 참고서. 전염병 위험 탓에 모두 버려야 했다. 요즘도 수해 뉴스를 볼 때면 그때가 생각난다. 잠겨버린 집을 두고 우리 가족은 진천의 한 초가집으로 이사를 했다. 세 식구의 이삿짐이 1톤 트럭도 채우지 못했다.
![](https://blog.kakaocdn.net/dn/bagb4K/btsHDU4mhnT/xRdlNy8X26UtdlI3fgBaB0/img.png)
가난은 부끄러운 게 아니라 불편한 것
불편했지만 나는 부끄럽지 않았다. 주어진 삶은 바꿀 수 없어도 앞으로의 삶은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다. 초가집에서 일기를 썼다. 언젠가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펜트하우스에서 잠들고 슈퍼카를 여러 대 몰겠다고 다짐했다. 매일 잠을 쫓기 위해 커피 원두를 씹으며 공부했다. 졸릴 때는 포크로 허벅지를 찔러가며 공부했다. 3시간만 잤다.
그렇게 치열하게 공부해 서울대학교 윤리교육과에 입학했다. 졸업 후 서울 세화여고에서 교사 생활을 시작했다. 가르친다는 건 참 매력적인 일이었다. 내가 관심을 기울인 만큼 아이들은 성장했다. 좀 더 많은 학생들에게 강의를 하고 싶어졌다. 인터넷 강의를 하면서 그 꿈을 이뤘다. 나는 더 큰 꿈을 품고 학원으로 옮겼다.
더 강해지기로 마음먹었다.
강사는 강의만 잘하면 되는 줄 알았다. 그러나 그게 다가 아니었다. 교무실에 들어서면 모두가 날 바라봤다. 유일한 여자 강사이기 때문이었다. '여성'으로서 차별도 겪어야 했다. 함께 몰려간 식당에서 풋고추가 나오면 “고추는 이지영이나 먹는 거”라고 했다. 회식 자리에서 남성 동료가 내 엉덩이를 만지기도 했다. 어디까지 버틸 수 있을까? 나는 더 강해지기로 마음먹었다.
나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학생들과도 마주쳤다. 가난한 아들. 지방에 사는 학생들. 눈에 밟혔다. 이 학생들이 조금 더 편하게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고 싶었다. 스카이에듀 시절, 29만 원만 내면 나를 포함해 모든 강사의 강의를 전부 들을 수 있는 '프리 패스 제도'가 만들어졌다. 이 제도 도입을 위해 기꺼이 내 몫을 양보했다.
밤 11시. 오늘 수업이 끝났지만, 나는 교재를 연구하고 있다.
10년 후 나는 어떤 사람이 돼 있을까? '노력 없이 얻은 게 아니라 노력의 결과로 이룬 사람'으로, 그때도 불리고 싶다.
내 제자들도 그랬으면 좋겠다.
본 기사는 이지영 강사 인터뷰 기사·방송·강의 등을 참고해 1인칭으로 작성했습니다.
필자도 이지영 선생님의 강의를 통해 수능 사회문화 과목에서 100점을 받았습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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